노원은 어떻게 아파트 숲이 되었을까
[아파트 도시. 노원.]
혹시 ‘계획도시 노원’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연립단지는 잘 보이지 않고 일자로 쭉 뻗은 도로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아파트 단지가 눈에 띈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아파트 숲이다. 그래서 노원구에는 계획도시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중에서도 상계주공아파트는 노원구에 있는 16단지의 대규모 아파트이다. 많은 아파트 중에서 상계주공아파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아파트가 노원구를 아파트 도시로 만든 선발대였고, 복사/붙여넣기를 한 듯 같은 모양으로 빽빽하게 차 있지 않고 사이에 각기 다른 상가, 놀이터, 공원 등 개성 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히 노원의 정체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아파트 단지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곳은 아파트 이전에 뭐가 있었길래 이렇게 넓은 땅에 대단지가 들어올 수 있었을까? 지금부터 그 비밀을 하나씩 밝혀본다.
[마들 평야는 상계주공아파트가 되었습니다.]
왼쪽은 A 아파트, 오른쪽은 B 아파트. 하지만 ‘롯데 백화점’에서 주변을 살펴보면… 앞 주공, 왼쪽 주공, 오른쪽 주공, 뒤 주공. 사방이 주공 아파트뿐이다. 상계주공아파트 부지는 얼마나 넓은 것일까?
상계 주공 1단지에만 24개의 아파트가 있다. 이런 단지가 16개나 있으려면 얼마나 넓은 땅이 필요했을까? 어떻게 이 넓은 땅을 한 종류의 아파트로만 채울 수 있었을까? 여기는 어떤 곳이었길래 넓은 땅을 모두 주공 아파트로 바꿀 수 있었을까?
‘마들 평야’. 노원구에서 살았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단어이다. ‘평야’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평원이라는 말과 같다고 나온다..
아파트 숲에서 살아온 우리에겐 실감 나지 않는 단어이다. 얼마나 넓었길래 평야라고 말했을까?
지금의 상계주공 1단지부터 16단지에 달하는 영역은 무려 지하철 세 정거장의 범위를
포함한다. 이 ‘아파트 숲’의 자리에는, 80년대 초 까지만 해도 드넓은 논밭이 있었다.
[청년과 함께 자란 상계주공아파트]
86년에 공사를 시작해 89년에 완공된 주공아파트. 오래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것밖에 안 됐나 생각할 수도 있다. 20대 중 후반이라면 자기 나이와 별 차이 안 나는 아파트 나이이다. 우리 가족은 92년에 이사 왔는데, 이 정도면 거의 아파트와 같이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30년을 바라보는 아파트지만, 우리가 살기 시작했을 땐 아직 지어진 지 5년, 10년도 안 된 신식 아파트였다.
[사라지길 강요받은 사람들]
마들 ‘평야’였지만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곳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서울은 60년대부터 기존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개발을 진행하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잘 알고 있는 백사마을 또한 60년대 청계 고가도로 건설로 인해 판자촌에 살던 철거민이 이주해 와 생겨난 마을이다.
80년대 상계주공아파트 자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85년부터 87년까지 생활 터전을 지키기 위한 철거민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재개발사업구역 내 토지, 건물을 가진 사람에게만 재개발 조합원의 자격이 주어졌는데, 마들 평야 자리에서 살던 대부분의 사람은 무허가 주택에서 살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투쟁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결국 뿔뿔이 주변부로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드넓은 마들 평야와 계획도시 이야기 사이에는 이런 비극도 숨어있다.
[너무나 체계적인 아파트]
노원은 왜 없는 게 없을까? 확실히 다른 아파트 단지에 비하면 오밀조밀 각종 시설이 잘 배치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단지 내 상가가 반드시 있고 놀이터는 물론 학교도 많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골고루 있어 노원역에는 늘 어린이와 청소년이 넘친다. 옛날엔 한 동 앞에 한 개의 놀이터가 있을 정도로 놀이터가 많았다. 관리사무소와 노인정도 단지마다 있다. 이렇게 체계적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상계주공아파트 설계 당시 아파트 건설 당시부터 학교, 상가, 종합병원, 사회복지 시설 등의 설계까지 생각해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계주공아파트의 건설은 단순히 아파트 건설이 아니라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 외 알아두면 쓸데없는 이야기들]
7살 때인가 동네에 크게 물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아파트가 물에 잠겨 전기와 물이 삼 일간 끊겼다. 12층에서 1층까지 물을 생수통에 받아오고 다시 12층까지 올라갔던 일이며, 당시 큰집에서 샤워했던 일이 기억난다. 지금은 거의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이런 일은 이 지역이 원래는 주변보다 낮은 지대였기 때문에 생긴 일인지도 모르겠다. 상계주공아파트 단지는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들 평야였던 이곳은 원래 중랑천보다 지대가 낮아 비가 올 때마다 잠겼다고 한다. 건설 당시 지반을 단단히 하기 위해 엄청난 흙이 투입되었다고. 지금도 중랑천, 당현천은 비가 올 때마다 넘쳐 진입이 제한된다.
공영 개발식 아파트가 모델하우스를 진행한 것도 이곳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홍보 영상까지 만들었는데, 건설 직후 주택시장이 침체되어 미분양이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지금이야 새로 만들어진 아파트를 홍보하기 위해 연예인들이 나오는 광고를 찍지만 그 당시엔 생소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홍보는 좋은 선택이었고 분양 경쟁률은 4:1까지 치솟았다.
당신이 살아보았을 혹은 앞으로 살 예정인 상계주공아파트의 역사를 살펴봤다. 마들 평야는 이렇게 아파트 숲이라고 불리는 계획도시로 변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20년, 30년이 지나 이제 ‘재개발’이라는 이슈로 옮겨지고 있다.
재개발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겐 복잡한 주제이다. 집값이 오른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곳을 떠났을 때 잃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상계주공아파트 또한 요즘 재개발 이슈로 소란스럽다. 최근 들어 포털 사이트 1면에는 노원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올라온다. 자연스럽게 오래 살아왔던 주민들은 이 동네를 떠나는 날을 생각해본다. 그러나 여전히 재개발에 회의적이고 떠날 때를 걱정하게 되는 것은 살아왔던 집들이 단지 몇 백 몇 호의 공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특히 상계주공아파트 주민에게 이사란 스물 몇 평의 작은 공간뿐 아니라 마을 전체를 잃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다닌 학교, 슈퍼, 친구와 놀았던 놀이터, 근린공원, 상가, 심지어 대학 병원까지 갖춘 이 작지만 완벽한 동네. 주민들은 한 동네 전체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오늘도 이 아파트와의 작별을 망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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